민영 재개발 세입자 일기 147 “이주(이사)” (에세이)

밤새 잠을 못 잤어. 생리적으로 머리가 바닥에 닿자마자 잠이 든다.

밤을 새운 것은 청년 시절 시 쓰기로 고민하던 시절 이래 처음이다.

긴 밤 아내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뒤척이며 눈을 감는 대형 스크린이 보인다.

처음 산성동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전날까지의 일이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펼쳐졌다.

한 편의 장편 영화였다.

2008년 성남서고 앞에 살았는데 산성동 당시 그곳은 재개발로 어려움을 겪던 곳이었다.

빌라촌의 반대가 심했다.

빌라촌은 거의 새집이었다.

평수도 넓었다.

집주인은 투기 목적의 지인이었다.

되도록 오래 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재개발 지역에서 오래 살 수는 없다.

그곳을 떠날 무렵 빌라촌이 재판에서 졌다고 한다.

산성동으로 이사한 집은 전주약국 뒷골목이었다.

2년 동안 그곳에 살았다.

남편이 돈이 필요하다고 전세로 내놓았다.

돈이 없었어. 이사 비용마저 줄이려고 지인의 트럭을 빌렸다.

이사할 집은 단대공원과 마주보고 있었다.

반지하했다.

이삿짐을 싣고 도착한 이사장에 문제가 생겼다.

주방 쪽에 누수가 생긴 것이다.

바닥은 물이 가득 차서 수도공사 중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공사가 끝났다.

거실 바닥은 축축했다.

남은 이삿짐을 싣기 위해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이삿짐은 골목에 내놓은 상태였다.

집주인의 강요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이었어.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가구를 제외한 살림살이가 도둑맞았다.

의류, 주방 생활, 책, 추억이 담긴 앨범, 선풍기. 세탁기 등이 사라졌다.

당장 갈아입을 옷과 숟가락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문 앞에 껍데기만 남은 삶을 쌓았다.

허망한 살림은 가벼웠다.

집주인은 밖에서 짐 싣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짐을 싣는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아내와 나는 잠자코 있었다.

서로 할 말을 잃었다.

아내는 표현을 억누르고 있지만 아마 속으로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아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정을 안 여동생이 그릇을 가져왔다.

의류는 지인들이 준비해줬다.

우리 가족은 갑자기 난민이 되어 버렸다.

반지하의 장점은 겨울 계절뿐이다.

틈새바람이 없어 추위에 강하다.

그러나 장마가 문제였다.

집안은 축축했다.

벽에 생긴 곰팡이는 여름 내내 냄새가 난다.

특히 장마철 방바닥에서 물이 가득했다.

걸레를 빨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장 잔혹한 시간이었다.

투기의 목적은 주인이 된 집주인은 장마가 끝난 뒤 벽지를 둘러댔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옆집은 누전이 심했다.

그 집에 오래 살았다.

어느 집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도 반지하를 탈출할 기회를 잡았다.

아내가 경기도시공사에 신청한 전세자금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최대 9천만원까지 지원하는 제도다.

당사자는 대출금의 5%만 내면 된다.

아내는 오랜만에 전셋집을 찾으러 갔다.

하던 사업을 접고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EQ도 팔았다.

아끼던 애마였다.

아파트를 떠나 처음에는 아들 방에 창문이 없는 전세로 갔다.

두 번째는 지인이 투기한 집에 1.000원을 내고 전세에 살고 있었다.

턱없이 싼 빌라의 전세였다.

지인의 배려였다.

아내는 도시공사나 LH 전세자금을 싫어하는 집주인이 꽤 있다고 말했다.

며칠 만에 전세의 집을 구했다.

산성동은 재개발 소문으로 이사오지 않았다.

빈집은 신흥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마을은 동남아시아인과 중국인이 많아졌다.

집세는 하락했다.

수정도서관에 강연하러 온 교수가 물었다.

전셋값이 왜 이렇게 싼지에 대해 수강생들이 마을 상황을 설명하자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사한 셋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가족들은 가끔 옥상에서 이 파티를 열었다.

옆 옥상에서는 자주 삼겹살 파티를 했다.

건물 사이는 50cm 거리를 두고 있었다.

20평씩 분양된 산성동의 특징이다.

옥상의 전망은 탁월했다.

인근 신흥 2구역은 철거 중이었다.

중원구에 있는 종합운동장 체육센터가 보이고, 그 뒤로 분당이 조망된다.

맑은 날에는 수원 광교산도 보였다.

신흥주공 재건축 현장 아파트는 영장산을 덮기 시작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신흥주공을 영장산을 헐고 아파트를 지었다.

이름도 바뀌었다.

현재 통보 8차석은 LH에서 복정2지구로 계획해 추진 중이다.

일부는 벌목도 했다.

이곳에 아파트를 지으면 안 된다고 영장산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떠드는 것 같다.

자신은 되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다.

돈이 제일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수정도서관에서 재개발로 사라지는 산성동 전시회가 있었다.

사진마다 산성동 이웃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특히 가을 친친음악회는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가수도 와서 마을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기량을 뽐냈다.

축제 장소였던 국궁장은 현재 체육시설로 완공을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런 축제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이다.

- 얼마 올랐어? – P가 얼마라고?뭐 이런 얘기가 중요하겠지.

문화가 없는 사람들이 대화는 이처럼 돈 이야기가 가장 관심사다.

누군가 말했다.

자기 재산은 쓴 돈뿐이라고. 맞다.

쓸 수 없는 돈을 두고 가면 노력 없는 유산이 될 수 있다.

그런 유산을 노력 없이 물려받았다.

나의 아버지다.

평생 인생을 망치는 일만 하고 지구여행을 마쳤다.

불쌍한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반면 교사가 되어준 아버지가 고맙다.

수정도서관 산성동 전시회를 보면서 나도 산성동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도서관에서 자서전 쓰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랑해야지. 자서전 쓰기는 4개월 동안 계속됐다.

일주일에 2시간씩 공부를 했다.

국문과 출신이 의외로 많았다.

그 나이에 대박이다.

결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중에서 내 글이 가장 많았다.

그때부터 산성동 사람들이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글재주는 넘쳤다.

몇 년 전 조합이 공고일 이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때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다.

그 후 2년 정도 지나 산성 구역이 관리 처분 인가를 받았다.

약 한 달 반 뒤 자체 진영의 주기가 정해졌다.

2021년 10월 25일까지였다.

기간은 1년이었다.

비대위가 생겼고 나도 비대위 활동을 했다.

집회는 자주 열렸고 기자회견장에도 갔다.

방송차를 몰고 순회방송을 하기도 했다.

조끼를 입고 마을 순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겨울철 강제집행이 시작됐다.

합법적이다.

불법적인 폭력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나는 즉시 비상대책위원회를 탈퇴했다.

당시 나는 조합과 소송 중이었다.

소송 내용은 주거이전비를 선지급하지 않고 진행하는 강제집행이 맞는지 묻는 재판이었다.

강제집행정지 결정을 받은 상태에서 재판이 이어졌다.

참고로 재개발 명도 소송에서 주거이전비를 선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합이 패소한 대법원 판결이 지난해 6월 15일 있었다.

산성 구역에서도 재개발 명도 소송이 기각된 경우가 있다.

아는 사이다.

산성 구역에 아직 남아 있는 세입자도 이 경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입자가 계속 물고 늘어질 경우 기간이 매우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다.

행정법원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3월 15일 변론이었다.

변론을 마치고 피고(조합) 측과 이달 말까지 이주하는 조건으로 결정했다.

일주일 뒤 예상대로 재판은 패소했다.

서로의 결정이 없었다면 항소할 뻔했다.

사실 유령 마을에 사는 게 싫었는데.

이사하는 아침이 되었다.

긴 밤이 지났다.

조식 먹고 포장 기다렸어. 7시 45분경 골목에 차 소리가 들린다.

짐 싸는 이사가 도착했다.

포장이사는 처음이다.

말로만 들어왔어. 나와 아내는 할 일이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 이삿짐은 도시가스가 오기 전에 완료될 것 같았다.

도시가스는 9시 30분에 예약되어 있었다.

가장 빠른 예약 시각이다.

8시경 한전에 전화를 했다.

예상외로 상담원이 전화를 받는다.

야호!
계량기 번호를 불러서 숫자를 알려줬어. 상담사는 거래 은행을 찾았다.

곧 메일이 왔다.

핸드폰 뱅킹을 했다.

이것으로 전기세는 끝이다.

다음은 상수도다 여기는 전화를 안받아. 아마 9시부터 받을 것 같아. 조합 이주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조합에서 확인을 한 후 열쇠를 전달해야 한다.

이주센터에서 수도요금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9시 15분경 수도요금이 청구되었다.

바로 입금했어 핸드폰뱅킹으로 하니까 너무 편하네. 예상대로 도시가스가 오기 전에 짐을 실었다.

따님, 이제 늦게 귀가하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공공이사가 말했다.

공공이사는 성남에 있는 이사 전문 상호다.

여기서 광고를 해줘야지. 성남에서 포장이사를 할 경우 공공이사를 추천한다.

연락처 010-8325-4147 정말 정성스럽게 포장이사를 해준다.

”무슨 일이야?”라고 나는 물었다.

“밤이면 여기가 무섭잖아요. 이사하는 곳은 밝고 큰길 아닌가요?” “사장님 말씀 들어보니까 딱이네요.” 맞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스에서 왔다.

오자마자 바깥 밸브부터 조이다.

이제 산성구역에서 잠그는 도시가스의 외부 밸브도 여럿 남아 있지 않다.

철거비용과 가스요금은 현장에서 단말기로 결제했다.

편안한 세상이다.

이제 정리됐어. 정화조 청소 비용은 며칠 전에 이주센터에서 지불했다.

이주센터에 가서 열쇠만 주면 돼. 그때 조합 이주센터 직원이 왔다.

현장을 둘러본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 내려왔다.

옥상에는 폐기물이 가득하다.

내가 이사 왔을 때부터 있었어. 텃밭용 대형 화분도 7개나 된다.

조합원은 낡은 폐기물로 인정해 주었다.

폐기물은 주인 몫으로 돌아갔다.

열쇠를 건네면서 이주 절차는 끝났다.

애마와 사다리차 이삿짐을 실은 영달트럭 두 대가 나란히 산성동을 떠났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PS 오후 1시경 집주인과 통화를 했다.

보증금에서 옥상폐기물 처리비를 빼고 보낸다고 한다.

폐기물 처리비용은 5만원이었다.

조금 억울했지만 빨리 정리하는게 좋을것같아서

밤새 잠을 못 잤어. 생리적으로 머리가 바닥에 닿자마자 잠이 든다.

밤을 새운 것은 청년 시절 시 쓰기로 고민하던 시절 이래 처음이다.

긴 밤 아내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뒤척이며 눈을 감는 대형 스크린이 보인다.

처음 산성동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전날까지의 일이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펼쳐졌다.

한 편의 장편 영화였다.

2008년 성남서고 앞에 살았는데 산성동 당시 그곳은 재개발로 어려움을 겪던 곳이었다.

빌라촌의 반대가 심했다.

빌라촌은 거의 새집이었다.

평수도 넓었다.

집주인은 투기 목적의 지인이었다.

되도록 오래 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재개발 지역에서 오래 살 수는 없다.

그곳을 떠날 무렵 빌라촌이 재판에서 졌다고 한다.

산성동으로 이사한 집은 전주약국 뒷골목이었다.

2년 동안 그곳에 살았다.

남편이 돈이 필요하다고 전세로 내놓았다.

돈이 없었어. 이사 비용마저 줄이려고 지인의 트럭을 빌렸다.

이사할 집은 단대공원과 마주보고 있었다.

반지하했다.

이삿짐을 싣고 도착한 이사장에 문제가 생겼다.

주방 쪽에 누수가 생긴 것이다.

바닥은 물이 가득 차서 수도공사 중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공사가 끝났다.

거실 바닥은 축축했다.

남은 이삿짐을 싣기 위해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이삿짐은 골목에 내놓은 상태였다.

집주인의 강요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이었어.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가구를 제외한 살림살이가 도둑맞았다.

의류, 주방 생활, 책, 추억이 담긴 앨범, 선풍기. 세탁기 등이 사라졌다.

당장 갈아입을 옷과 숟가락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문 앞에 껍데기만 남은 삶을 쌓았다.

허망한 살림은 가벼웠다.

집주인은 밖에서 짐 싣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짐을 싣는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아내와 나는 잠자코 있었다.

서로 할 말을 잃었다.

아내는 표현을 억누르고 있지만 아마 속으로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아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정을 안 여동생이 그릇을 가져왔다.

의류는 지인들이 준비해줬다.

우리 가족은 갑자기 난민이 되어 버렸다.

반지하의 장점은 겨울 계절뿐이다.

틈새바람이 없어 추위에 강하다.

그러나 장마가 문제였다.

집안은 축축했다.

벽에 생긴 곰팡이는 여름 내내 냄새가 난다.

특히 장마철 방바닥에서 물이 가득했다.

걸레를 빨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장 잔혹한 시간이었다.

투기의 목적은 주인이 된 집주인은 장마가 끝난 뒤 벽지를 둘러댔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옆집은 누전이 심했다.

그 집에 오래 살았다.

어느 집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도 반지하를 탈출할 기회를 잡았다.

아내가 경기도시공사에 신청한 전세자금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최대 9천만원까지 지원하는 제도다.

당사자는 대출금의 5%만 내면 된다.

아내는 오랜만에 전셋집을 찾으러 갔다.

하던 사업을 접고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EQ도 팔았다.

아끼던 애마였다.

아파트를 떠나 처음에는 아들 방에 창문이 없는 전세로 갔다.

두 번째는 지인이 투기한 집에 1.000원을 내고 전세에 살고 있었다.

턱없이 싼 빌라의 전세였다.

지인의 배려였다.

아내는 도시공사나 LH 전세자금을 싫어하는 집주인이 꽤 있다고 말했다.

며칠 만에 전세의 집을 구했다.

산성동은 재개발 소문으로 이사오지 않았다.

빈집은 신흥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마을은 동남아시아인과 중국인이 많아졌다.

집세는 하락했다.

수정도서관에 강연하러 온 교수가 물었다.

전셋값이 왜 이렇게 싼지에 대해 수강생들이 마을 상황을 설명하자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사한 셋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가족들은 가끔 옥상에서 이 파티를 열었다.

옆 옥상에서는 자주 삼겹살 파티를 했다.

건물 사이는 50cm 거리를 두고 있었다.

20평씩 분양된 산성동의 특징이다.

옥상의 전망은 탁월했다.

인근 신흥 2구역은 철거 중이었다.

중원구에 있는 종합운동장 체육센터가 보이고, 그 뒤로 분당이 조망된다.

맑은 날에는 수원 광교산도 보였다.

신흥주공 재건축 현장 아파트는 영장산을 덮기 시작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신흥주공을 영장산을 헐고 아파트를 지었다.

이름도 바뀌었다.

현재 통보 8차석은 LH에서 복정2지구로 계획해 추진 중이다.

일부는 벌목도 했다.

이곳에 아파트를 지으면 안 된다고 영장산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떠드는 것 같다.

자신은 되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다.

돈이 제일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수정도서관에서 재개발로 사라지는 산성동 전시회가 있었다.

사진마다 산성동 이웃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특히 가을 친친음악회는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가수도 와서 마을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기량을 뽐냈다.

축제 장소였던 국궁장은 현재 체육시설로 완공을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런 축제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이다.

- 얼마 올랐어? – P가 얼마라고?뭐 이런 얘기가 중요하겠지.

문화가 없는 사람들이 대화는 이처럼 돈 이야기가 가장 관심사다.

누군가 말했다.

자기 재산은 쓴 돈뿐이라고. 맞다.

쓸 수 없는 돈을 두고 가면 노력 없는 유산이 될 수 있다.

그런 유산을 노력 없이 물려받았다.

나의 아버지다.

평생 인생을 망치는 일만 하고 지구여행을 마쳤다.

불쌍한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반면 교사가 되어준 아버지가 고맙다.

수정도서관 산성동 전시회를 보면서 나도 산성동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도서관에서 자서전 쓰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랑해야지. 자서전 쓰기는 4개월 동안 계속됐다.

일주일에 2시간씩 공부를 했다.

국문과 출신이 의외로 많았다.

그 나이에 대박이다.

결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중에서 내 글이 가장 많았다.

그때부터 산성동 사람들이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글재주는 넘쳤다.

몇 년 전 조합이 공고일 이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때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다.

그 후 2년 정도 지나 산성 구역이 관리 처분 인가를 받았다.

약 한 달 반 뒤 자체 진영의 주기가 정해졌다.

2021년 10월 25일까지였다.

기간은 1년이었다.

비대위가 생겼고 나도 비대위 활동을 했다.

집회는 자주 열렸고 기자회견장에도 갔다.

방송차를 몰고 순회방송을 하기도 했다.

조끼를 입고 마을 순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겨울철 강제집행이 시작됐다.

합법적이다.

불법적인 폭력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나는 즉시 비상대책위원회를 탈퇴했다.

당시 나는 조합과 소송 중이었다.

소송 내용은 주거이전비를 선지급하지 않고 진행하는 강제집행이 맞는지 묻는 재판이었다.

강제집행정지 결정을 받은 상태에서 재판이 이어졌다.

참고로 재개발 명도 소송에서 주거이전비를 선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합이 패소한 대법원 판결이 지난해 6월 15일 있었다.

산성 구역에서도 재개발 명도 소송이 기각된 경우가 있다.

아는 사이다.

산성 구역에 아직 남아 있는 세입자도 이 경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입자가 계속 물고 늘어질 경우 기간이 매우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다.

행정법원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3월 15일 변론이었다.

변론을 마치고 피고(조합) 측과 이달 말까지 이주하는 조건으로 결정했다.

일주일 뒤 예상대로 재판은 패소했다.

서로의 결정이 없었다면 항소할 뻔했다.

사실 유령 마을에 사는 게 싫었는데.

이사하는 아침이 되었다.

긴 밤이 지났다.

조식 먹고 포장 기다렸어. 7시 45분경 골목에 차 소리가 들린다.

짐 싸는 이사가 도착했다.

포장이사는 처음이다.

말로만 들어왔어. 나와 아내는 할 일이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 이삿짐은 도시가스가 오기 전에 완료될 것 같았다.

도시가스는 9시 30분에 예약되어 있었다.

가장 빠른 예약 시각이다.

8시경 한전에 전화를 했다.

예상외로 상담원이 전화를 받는다.

야호!
계량기 번호를 불러서 숫자를 알려줬어. 상담사는 거래 은행을 찾았다.

곧 메일이 왔다.

핸드폰 뱅킹을 했다.

이것으로 전기세는 끝이다.

다음은 상수도다 여기는 전화를 안받아. 아마 9시부터 받을 것 같아. 조합 이주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조합에서 확인을 한 후 열쇠를 전달해야 한다.

이주센터에서 수도요금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9시 15분경 수도요금이 청구되었다.

바로 입금했어 핸드폰뱅킹으로 하니까 너무 편하네. 예상대로 도시가스가 오기 전에 짐을 실었다.

따님, 이제 늦게 귀가하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공공이사가 말했다.

공공이사는 성남에 있는 이사 전문 상호다.

여기서 광고를 해줘야지. 성남에서 포장이사를 할 경우 공공이사를 추천한다.

연락처 010-8325-4147 정말 정성스럽게 포장이사를 해준다.

”무슨 일이야?”라고 나는 물었다.

“밤이면 여기가 무섭잖아요. 이사하는 곳은 밝고 큰길 아닌가요?” “사장님 말씀 들어보니까 딱이네요.” 맞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스에서 왔다.

오자마자 바깥 밸브부터 조이다.

이제 산성구역에서 잠그는 도시가스의 외부 밸브도 여럿 남아 있지 않다.

철거비용과 가스요금은 현장에서 단말기로 결제했다.

편안한 세상이다.

이제 정리됐어. 정화조 청소 비용은 며칠 전에 이주센터에서 지불했다.

이주센터에 가서 열쇠만 주면 돼. 그때 조합 이주센터 직원이 왔다.

현장을 둘러본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 내려왔다.

옥상에는 폐기물이 가득하다.

내가 이사 왔을 때부터 있었어. 텃밭용 대형 화분도 7개나 된다.

조합원은 낡은 폐기물로 인정해 주었다.

폐기물은 주인 몫으로 돌아갔다.

열쇠를 건네면서 이주 절차는 끝났다.

애마와 사다리차 이삿짐을 실은 영달트럭 두 대가 나란히 산성동을 떠났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PS 오후 1시경 집주인과 통화를 했다.

보증금에서 옥상폐기물 처리비를 빼고 보낸다고 한다.

폐기물 처리비용은 5만원이었다.

조금 억울했지만 빨리 정리하는게 좋을것같아서